Post by Soojeong Bae

SK Academy, Research Fellow. Cognitive Psychology, Ph.D.

번아웃이라기엔 약하고, 게으름이라기엔 억울한 상태 요즘 제가 그렇습니다. 일이 안 되는 건 아니에요. 그런데 하다 말고 '이걸 왜 하고 있나' 싶은 순간이 자꾸 생깁니다. 열심히는 하는데, 이게 무슨 의미가 있나. 그 헛헛함이 며칠째 가시질 않네요. '노잼시기'랄까요. — 긴 고통을 참는 건 그래도 잘하는 편이라고 생각해왔는데, 정작 저를 흔드는 건 악소리 나게 힘든 구간이 아니더라고요. 마라톤으로 치면 중반입니다. 출발의 설렘은 식었고, 결승선은 아직 안 보이는 어중간한 지점. 다리가 아픈 것보다, '이걸 굳이 끝까지 가야 하나' 싶은 멍한 권태가 훨씬 견디기 힘듭니다. 그래서 이 권태를 어떻게든 빨리 떨쳐낼 방법만 찾고 있었는데, 한 연구가 그 전제를 통째로 뒤집었습니다. — Van Tilburg과 Igou(2017)는 권태를 '고장'이 아니라 '신호'로 봅니다. 지금 하는 일이 무의미하게 느껴질 때 우리는 지루해지는데, 그 지루함이 곧 '의미를 다시 찾으라'고 울리는 내적 알람이라는 거예요. 실제로 이들이 사람들에게 일부러 지루한 과제를 시킨 뒤 살펴보니, 지루함을 느낀 쪽이 기부 같은 '의미 있는' 행동에 더 마음이 기울었습니다 (Van Tilburg & Igou, 2017). 권태가 떠밀어낸 게 게으름이 아니라, 의미를 향한 허기였던 셈입니다. — 흥미로운 건, 권태에 빠진 마음이 스스로 더듬어 찾는 게 따로 있다는 점입니다. 바로 옛 기억이에요. 같은 연구팀이 사람들을 일부러 지루하게 만들었더니, 이들은 부쩍 옛날 일을 곱씹기 시작했습니다 (Van Tilburg, Igou, & Sedikides, 2013). 한때 마음을 쏟았던 장면, 의미로 가득 찼던 순간들로요. 흔히 향수를 한가한 감상이나 현실 도피쯤으로 여기죠. 그런데 권태가 떠민 이 회상에는 분명한 기능이 있었습니다. 그 회상이 흐릿해졌던 '의미'의 감각을 다시 데워준 거예요. 그러니까 마음은 '의미가 고프다' 싶을 때, 지금 당장이 아니라 '뭐가 나를 채웠었는지'부터 되짚습니다. 허기의 답을 과거에서 먼저 찾는 셈이죠. — 이 어정쩡한 상태에 이름이 있다는 것도 뒤늦게 알았습니다. Keyes(2002)가 말한 languishing, 시들어가는 상태입니다. 무너진 것(질병)도 아니고 활짝 핀 것(번성)도 아닌, 그 사이 어딘가의 가라앉음인데요. Adam Grant가 2021년에 "당신이 느끼는 그 멍한 상태에도 이름이 있다"며 다시 꺼냈던 그 개념이요. — 겹쳐 놓고 보니 생각이 좀 바뀌었습니다. 지금의 이 헛헛함은 일이 무의미해졌다는 증거가 아니라, 의미를 다시 맞추라고 울리는 알람일 수도 있다는 것이죠. 다만 알람이 울린다고 방향까지 생기는 건 아니라서, 그 허기를 어디로 데려갈지는 결국 제 몫으로 남습니다. — 그래서 요즘 제가 붙들고 있는 질문은 이겁니다. 이 멍한 권태를 서둘러 끄려고만 할 게 아니라, '그래서 나는 지금 무슨 의미가 고픈 걸까'를 한번 들여다봐야 하는 건 아닐까 싶습니다. — 참고문헌 📚 Van Tilburg, W. A. P., & Igou, E. R. (2017). Can Boredom Help? Increased Prosocial Intentions in Response to Boredom. Self and Identity, 16(1), 82–96. https://lnkd.in/guZDV69g 📚 Van Tilburg, W. A. P., Igou, E. R., & Sedikides, C. (2013). In Search of Meaningfulness: Nostalgia as an Antidote to Boredom. Emotion, 13(3), 450–461. https://lnkd.in/gsjANke6 📚 Keyes, C. L. M. (2002). The Mental Health Continuum: From Languishing to Flourishing in Life. Journal of Health and Social Behavior, 43(2), 207–222. https://lnkd.in/gyJX6baH